좋은시 와 좋은글

가을 편지(6~10) / 이해인

백합7 2006. 9. 2. 10:41
 
        가을 편지(6~10) / 이해인 (6)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 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(7)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(8) 빛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 잎에도 내가 살아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 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(9) 당신을 기억할 때 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(10)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앞에 늘 소심증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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